[신(新) 지정학 잔혹사 ④] 중동발 특수에 웃은 석화업계…하반기 ‘역래깅’ 덮치나

마이데일리

<편집자주> 초격차 기술과 품질로만 경쟁하던 시대는 끝났다. 미 트럼프 행정부발 관세 폭탄이 빚은 보호무역주의와 파편화된 공급망이 기업 경영의 핵심 변수로 부각하면서 기업의 생산과 수출, 투자 전략 등을 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미국과 이란 전쟁이 낳은 지정학적 리스크라는 암초까지 기업 경영의 새로운 상수(常數)로 자리 잡으면서 기업들을 벼랑 끝으로 몰고 있다. 마이데일리는 우리 기업들이 맞닥뜨린 지정학적 위기의 실체를 진단하고, 기업들의 대응 전략과 하반기 경영 환경에 미칠 영향을 짚어본다.

롯데케미칼 인도네시아(LCI) 석유화학단지 전경. /롯데케미칼

[마이데일리 = 심지원 기자] 국내 주요 석유화학 기업들의 실적 방어에 비상등이 켜졌다. 수익성의 핵심 지표인 ‘에틸렌 스프레드(에틸렌 가격에서 원료인 나프타 가격을 뺀 값)’가 손익분기점을 크게 밑돌고 있어서다. 중동발 지정학 리스크에 힘입어 2분기 실적개선세를 보였던 석화기업들의 실적 반전 우려가 현실화되는 모습이다.

10일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LG화학 석유화학부문은 2분기 매출 5조3289억원, 영업이익 4265억원을 기록했다. 전년 동기 영업손실 904억원에서 큰 폭으로 반전한 수치다. 이 같은 석유화학 부문의 반등은 LG화학 전사 실적까지 끌어올려, LG화학은 2분기 연결 기준 영업이익 5996억원을 기록하며 전분기 영업손실 497억원에서 흑자로 돌아섰다. 사실상 석유화학이 그룹 전체를 흑자로 견인한 셈이다.

한화솔루션 케미칼부문도 매출 1조4650억원, 영업이익 871억원을 올리며 2개 분기 연속 흑자를 이어갔다. SK이노베이션에서 화학 사업을 전담하는 SK지오센트릭은 매출 3조7331억원, 영업이익 437억원을 기록했다.

롯데케미칼도 2분기 연결 기준 매출 5조6864억원, 영업이익 1101억원을 기록하며 전년 동기 대비 흑자로 전환했다. 사업부문별로는 기초화학이 매출 3조9403억원, 영업이익 23억원을 기록해 전년 동기 2161억원 영업손실에서 2184억원 개선되며 흑자전환했고, 첨단소재는 영업이익 1325억원으로 전년 대비 136.6% 늘었다. 다만 기초화학은 정기보수 영향과 원료가격 변동에 따른 래깅 효과로 전분기 대비 수익성이 오히려 감소했다.

이번 실적 개선은 수익성 지표로 쓰이는 에틸렌 스프레드가 전쟁 기간 손익분기점을 넘어 톤(t)당 250달러 가까이 다가가면서 만든 효과다. 중동 리스크로 석유화학 제품 가격이 먼저 오른 가운데, 전쟁 이전 낮은 가격에 확보해둔 원료를 투입하면서 마진이 개선되는 이른바 ‘래깅 효과’가 2분기 실적을 견인했다는 설명이다. LG화학 역시 2분기 수익성 개선 배경으로 “재고 래깅이 긍정적으로 크게 발생했고 스프레드도 상당 부분 개선됐다”고 전했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를 뚫고 200만 배럴의 원유를 실은 유조선 유니버설호가 지난 6월 10일 울산 남구 울산항 원유부이로 정박하고 있다. /뉴시스

◇벌써 시작된 반전…에틸렌 스프레드 두 달 새 반토막 아래로

문제는 지정학적 불안에 기댄 이익 구조가 유가가 정체되거나 하락하는 순간 정반대로 작동한다는 점이다. 유가가 꺾이는 시점에는 고가에 산 나프타로 만든 제품을 저가에 팔아야 하는 ‘역래깅’과 재고평가손실이 한번에 터져 나올 수 있다는 우려가 업계 안팎에서 제기되고 있다. 당장 3분기부터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

실제로 이 우려는 이미 수치로 확인되고 있다. 산업통상부 원자재가격정보에 따르면 에틸렌 스프레드는 지난 4월 평균 t당 약 315달러를 기록한 이후 6월 135~163달러 수준으로 떨어졌고, 지난달 30일 기준으로는 100달러 선마저 무너졌다. 31일 기준으로는 t당 78달러까지 밀리며 3개월 새 약 75% 급락했다. 이는 사실상 전쟁이 본격화하기 이전 수준까지 되돌아간 셈이다.

LG화학 역시 2분기 실적발표 콘퍼런스콜에서 하반기 위험 요인으로 역래깅을 지목했다. 양철호 LG화학 석유화학 경영전략그룹장은 “재고의 부정적인 래깅 효과와 더불어 해상 운임이 상반기 대비 하반기에 약 60% 정도 올랐다”며 “7월 전쟁 불확실성이 확대되면서 원료 가격의 일별 변동 폭도 커지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 “최근에는 원료 가격이 상승한 만큼 제품 가격이 동반 상승하지 못하는 상황”이라며 “수요가 뒷받침되지 못하거나 불확실한 상황에서 고객들이 구매를 미루고 관망하는 영향일 수 있어 하반기 관리해야 할 주요 리스크로 판단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역래깅 신호는 석유화학보다 한발 앞서 정유 부문에서 먼저 감지됐다. 같은 SK이노베이션 계열의 정유사인 SK에너지는 6월 이후 유가 하락 영향으로 전분기 대비 영업이익이 6320억원 감소했다고 밝혔다. 업스트림 격인 정유업에서 유가 하락에 따른 마진 축소가 먼저 실적에 반영된 만큼 다운스트림인 석유화학에도 비슷한 흐름이 시차를 두고 번질 가능성이 있다.

여기에 지정학 변수와 무관한 구조적 악재도 겹친다. 황성현 유진투자증권 연구원은 “중국 화학 신규 생산능력이 올해 상반기 435만t 대비 하반기 3400만t을 웃돌 것”이라며 “중국 부동산 경기 부진으로 범용 화학제품 수요가 강하게 반등하기 어렵다”고 진단했다. 중동 리스크가 완화되더라도 중국발 공급과잉이라는 별도의 악재가 하반기 내내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분석이다.

미국·이란 전쟁 여파로 유가가 급등하고 각 국 비축유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는 지난 3월 24일 울산 남구 석유화학 공단에 원유 저장탱크의 모습이 보이고 있다. /뉴시스

◇재점화된 중동 리스크…호르무즈 이어 홍해까지

중동 정세도 다시 악화되고 있다. 미국과 이란 간 무력 충돌로 긴장이 고조된 가운데, 사우디 해상 봉쇄를 선언한 예멘의 친이란 무장세력 후티는 사우디 알슈카이크 남서쪽 홍해 해상에서 유조선을 공격했다고 주장했다. 봉쇄 선언 이후 후티가 실제 선박을 공격한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호르무즈에 이어 홍해 항로까지 흔들리며 에너지 공급망 위기가 현실화하는 모습이다. 사우디 역시 후티가 통제하는 예멘 지역에 대한 공습으로 맞서고 있어 확전 우려도 커지고 있다.

유가 향방을 둘러싼 전망은 엇갈린다. 중동 리스크가 현 수준으로 장기화하면 고유가에 따른 나프타 원가 부담은 커지는데 전방 수요 침체로 에틸렌 가격은 오르지 못하는 이중고에 빠질 수 있다. 반대로 사태가 진정 국면에 접어들어도 안심할 수 없다. 비쌀 때 사둔 원료로 만든 제품을 낮아진 가격에 팔아야 하는 역래깅 효과가 단기간에 몰릴 수 있어서다.

롯데케미칼 역시 “기초화학 및 첨단소재사업은 3분기에도 대외 불확실성이 지속되는 가운데 글로벌 수요 회복 지연과 원료가격 변동성 확대가 예상된다”고 밝혔다.

전문가는 중동발 공급망 리스크에 따른 반사이익은 지속 가능성이 낮다며, 중동 의존도를 낮추고 고부가 제품·공급처 다변화를 통해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병준 한국폴리텍대 석유화학공정과 교수는 중동 리스크 장기화가 업계에 미칠 영향에 대해 “호르무즈에 이어 홍해까지 막히면 원료 수급 자체가 어려워지는 상황”이라며 “투입되는 원료가 줄어들면 수급 밸런스가 깨지고, 에너지 비용이 오르면서 산업 전반의 비용이 함께 뛰는 구조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이어 “지금은 원료 공급이 어려워 제품 가격이 오르면서 석화 기업들이 견조한 실적을 내고 있지만, 이는 기술적 경쟁력 향상이 아니라 외부 환경 변화에 따른 결과”라며 “언제든 갑자기 줄어들거나 늘어날 수 있어 예측이 쉽지 않고, 지속가능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결국은 중동 의존도를 낮추는 공급처 전환이 필요하다”며 “스페셜티 제품 비중을 늘리거나 재생에너지 기반 원료로 나프타를 대체하는 등 공급 다변화가 근본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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