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이데일리 = 심지원 기자] 삼성전자 노사가 총파업 돌입을 1시간 30분 앞두고 극적으로 임단협에 잠정 합의했다. 이로써 100조원 규모로 추산되던 사상 초유의 반도체 가동 중단 위기는 일단 모면하게 됐다. 그러나 이번 사태가 국내 산업계와 노동계, 글로벌 공급망에 던진 파장은 결코 가볍지 않다. 전문가들은 당장의 사태는 막았으나 ‘성과주의 원칙의 무력화’와 ‘글로벌 시장 신뢰 회복’이라는 무거운 숙제를 남겼다고 평가한다.
◆ 임금 6.2% 인상·성과급 체계 개편…파업은 일단 유보
21일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 노사는 전날 오후 경기도 수원 노동부 경기고용노동청에서 ‘2026년 임금·단체협상 잠정 합의안’에 최종 서명했다. 지난해 12월 16일 첫 본교섭을 시작한 지 약 5개월 만이다.
합의안의 핵심은 성과급 체계의 전면 개편이다. 노사는 갈등의 핵심이었던 성과급을 성과인센티브(OPI)와 사업성과의 10.5%를 재원으로 하는 반도체(DS) 부문 특별경영성과급으로 구분해 지급하기로 합의했다. 특히 DS 부문 특별경영성과급은 상한선을 없애기로 했다. 또 최대 쟁점이었던 적자 사업부 대상 차등 지급(페널티)은 올해 적용을 유예해 내년부터 시행하기로 했다. 재원의 40%를 반도체 부문에 우선 균등 배분하고 나머지 60%를 사업부별로 나누며, 세후 전액 자사주로 지급하는 방식이다.
시장에서 추산하는 올해 삼성전자 영업이익 전망치 300조원을 단순 대입할 경우 메모리 사업부 직원의 경우 약 6억원의 성과급을 받게 된다. 올해 적자가 유력한 비메모리(시스템LSI·파운드리) 사업부 직원 역시 최소 1억6000만원 규모의 성과급을 챙길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 밖에 올해 임금 인상률은 기본급 4.1%, 성과기준 2.1%를 더해 총 6.2%로 확정됐다. 세부적으로는 완제품(DX) 부문 직원들에게 600만원 규모의 자사주가 지급되며, 해당 주식은 3분의 1씩 각각 즉시 매각, 1년 보호예수, 2년 보호예수 조건이 부여된다.

◆ 흔들린 성과주의…산업계 ‘도미노 요구’ 우려
삼성전자 노사가 극적으로 임단협을 타결했지만 경제계의 시선은 무겁다. 무엇보다도 이번 합의가 삼성의 핵심 경영 철학인 ‘성과 있는 곳에 보상 있다’는 성과주의 원칙을 뒤흔들었기 때문이다. 사측이 적자 사업부에 대한 페널티를 유예하고 재원의 40%를 균등 배분하기로 노조 측에 양보하면서, 그동안 삼성을 지탱해 온 실적 연동형 보상 체계가 사실상 무력화됐다는 지적이 지배적이다. 특히 국내 대표 기업인 삼성전자가 실적과 무관한 ‘형평성 중심’의 성과급 지급에 문을 열어줌에 따라 향후 타 대기업 노조들도 일제히 균등 분배를 요구하는 도미노 파장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우려도 깊어지고 있다.
황용식 세종대 경영학과 교수는 삼성의 성과주의 원칙이 흔들린 배경에 경쟁사 간의 보상 심리 비교가 작용했다고 분석했다. 황 교수는 “그동안 사측의 보상 방식에 내부 불만이 있었는데, 경쟁사인 SK하이닉스의 성과급 체계가 투명하게 공개되면서 격차가 도드라진 것이 이번 사태의 도화선이 됐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분명히 산업계 전반에 도미노 효과가 있을 것”이라며 “향후 타 기업 노조들이 이번 합의안을 레퍼런스(참조 기준) 삼아 사측을 압박할 가이드라인으로 활용할 가능성이 크다”고 진단했다.
반면 노동사회학적 관점에서는 이를 경영 패러다임의 자연스러운 전환으로 본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삼성전자가 성과주의를 포기했다기보다, 그동안 사측이 유지하던 무노조 경영 체제가 끝나고 처음 이뤄진 결과”라고 평가했다.
이어 “국민적 기업인 삼성전자인 만큼 너도나도 성과급에 대한 노조의 요구가 봇물 터지듯 나올 것”이라면서도 “이번 사안이 다행히 파업으로 흐르지 않고 타협으로 마무리됐기에 향후 타 기업에서 성과급이 쟁점으로 부각되더라도 노사가 파국 대신 타협으로 끝내야 한다는 선례(케이스)로 작용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 깊어진 노노(勞勞) 갈등…찢어진 내부 결속 수습 난제
삼성전자 내부 봉합도 해결해야 할 과제다. 합의안 도출 직후 삼성전자 내부는 ‘노노 갈등’이라는 또 다른 뇌관이 터진 모양새다. 노조 지도부가 DS 부문 성과급 타결에 집중하면서 DX 부문 조합원들의 불만이 폭발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근 한 달간 DX 부문 조합원 약 5000명이 탈퇴를 신청했고, 일부는 교섭 중단 가처분 신청까지 냈다. 여기에 최승호 초기업노조 위원장이 텔레그램 메신저방을 통해 “DX는 솔직히 못 해 먹겠다, 노조 분리를 고민하자”고 언급한 사실이 알려지며 갈등이 극에 달했다.
황 교수는 이에 대해 “노노 갈등을 봉합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똑같이 보상하는 것이겠지만, 성과급의 본래 취지는 우수한 성적을 낸 사업단에 더 큰 보상을 주는 것”이라며 “불만이 있는 사업부라면 이를 계기로 향후 더 높은 성과를 내서 증명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이 교수도 “교섭이 처음이다 보니 노조가 전략적으로 통합을 이끌지 못했다. 수익을 기준으로 편 나누기를 시작하면 노조는 하나 둘 분열해 결국 약해질 수밖에 없다”면서 “지나친 성과급 경쟁은 조직 문화를 갈등적으로 만들기 때문에 사측도 유념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노노 갈등이 사법 절차로 번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양승엽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내부 노동자 간의 노노 갈등에 법이 개입할 수 있는 역할은 제한적”이라며 “결국은 노조 내부의 차별적 합의 존재 여부를 따져 노조 지도부의 책임을 묻는 법원 분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 ‘글로벌 시장 신뢰 회복’이라는 숙제
이번 협상을 주도했던 정부 역할에 대한 해석도 엇갈린다.
경영계에서는 정부가 경제적 파국을 막겠다는 명분으로 파업 전에 직접 개입하는 관행이 굳어질 경우 결과적으로 공권력이 사측의 양보만을 종용하고 압박하는 ‘뉴 노멀(새로운 공식)’이 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이 교수는 “공적 개입이 많아질수록 노사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정부에 의존하는 경향이 생긴다”며 “매번 정부가 나서야만 타결되는 구조는 노사 관계의 자율성을 해친다”고 짚었다.
다만 국가 경제적 안보 측면에서의 특수성을 고려한 이례적인 상황이라는 시각도 존재한다. 이 교수는 “삼성전자의 반도체 비중과 국가 경제에 미치는 전방위적 파급력을 감안할 때 실제 파업이 일어났을 때의 타격은 상상 이상이었을 것”이라며 “노사 모두가 워낙 미숙했던 상황에서 정부의 개입은 파국을 막는 적절한 압박으로 작용했다”고 평가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가 남긴 가장 시급한 과제로 글로벌 시장의 신뢰 회복을 꼽았다. 매년 임단협이 진행되는 만큼 향후 언제든 재발할 수 있는 파업 리스크를 근본적으로 지우는 것이 급선무라는 것이다. 글로벌 빅테크 등 주요 고객사들은 공급망의 안정성을 최우선 가치로 두기 때문에 파업 불안감이 상존하는 기업에 대규모 물량을 발주하거나 장기 공급 계약을 맺기를 주저할 수밖에 없다는 분석에서다. 극적 타결로 당장의 파국은 막았지만, 리스크 노출로 인한 신뢰를 다시 다져야 하는 무거운 숙제가 회사 경영진에게 남겨진 셈이다.
황 교수는 “해외 주요 공급망 국가들은 한국 특유의 강성 파업 리스크를 쉽게 납득하지 못한다”며 “최악의 경우 글로벌 거래선이 끊어질 수 있으므로 향후 어떠한 불확실성도 만들지 않는 것이 경영진의 최우선 과제”라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이제는 삼성전자도 노조가 존재하는 기업이 됐고, 파업 리스크가 사업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확인했다”면서 “향후 글로벌 고객사들의 신뢰를 회복하는 근본적인 열쇠는 사측이 노사 관계를 얼마나 선진화시키고 상생의 파트너로 인정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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