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인트경제] 해양수산부가 부산에 둥지를 튼 지 넉 달이 지났다. 지난해 11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부산 해양수도 이전기관 지원에 관한 특별법’이 발효되고, 12월 청사 이전이 마무리되면서 부산은 이제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해양정책의 심장부가 됐다. 선언으로 시작한 ‘해양수도 부산’이 25년 만에 법률로 완성된 것이다. 이 격변의 한가운데, 부산 해운대 마린시티에 본사를 둔 한 공공기관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한국해양진흥공사(해진공)다.
◆ 한진해운 부도가 낳은 기관
해진공은 2016년 한진해운 파산이라는 충격이 남긴 산물이다. 국내 1위 해운사의 부도는 수만 개의 컨테이너가 전 세계 항구에 발이 묶이는 사태로 번졌고, 해운산업에 대한 국가적 안전망의 부재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에 정부는 2018년 7월 해운기업 선박 도입과 유동성 지원을 전담할 정책금융기관으로 해진공을 설립했다. 기존의 한국선박해양주식회사·한국해양보증보험·한국해운거래정보센터 세 기관을 흡수 통합한 형태다.
설립 근거인 한국해양진흥공사법은 그 목적을 명확히 했다. ‘해운기업의 안정적인 선박 도입과 유동성 확보를 지원하고, 해운산업의 성장에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해 해운 경쟁력을 강화함으로써 국가경제 발전에 이바지’ 하는 것이다.
◆ 7년간 145곳에 15조를 쐈다
해진공의 7년 성적표는 수치로 명확하다. 공사 발표에 따르면 설립 이후 2025년 말 기준 145개 해양기업에 누적 15조원의 금융을 지원했으며, 2025년 한 해에만 국적선사 선박금융 2조 2100억원, 항만·물류·인프라 금융 3400억원을 공급했다. 단순 보증에서 투자로, 국내에서 글로벌 시장으로 외연을 넓혀온 결과다.
같은 기간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외화채권·신디케이트 론 등을 통해 7억 달러(약 1조원) 규모의 외화를 조달하기도 했다. 국내 정책금융 수준을 넘어, 국제 해양금융 시장에서 독자적인 자금 조달 능력을 키워가고 있다는 의미다.
지난해 10월에는 국내 최초로 ESG(환경·사회·지배구조) 연계 선박금융 보증도 시행했다. 유코카캐리어스와 하나은행이 체결한 지속가능성연계대출(SLL)에 미화 1억 3500만 달러(약 1900억원) 원금의 95%를 보증하며, 친환경 목표 달성 여부에 따라 금리가 조정되는 구조를 국내 선박금융 시장에 처음 도입했다. 단순 자금 지원을 넘어 해운업의 친환경 전환을 금융 구조로 유도하겠다는 방향 전환이다.
◆ 안병길 호, 확장의 닻을 올리다
안병길 사장(3대, 임기 2027년 10월까지)은 부산일보 사장과 21대 국회 농해수위 위원 출신으로, 2024년 10월 해진공 수장으로 취임했다. 해운 현장보다 언론·정치 무대에 더 익숙했던 그가 1년 반 만에 내놓은 답은 ‘선박금융 전문기관’에서 ‘종합해양지원기관’으로의 도약이었다. 그 첫 손길이 닿은 곳은 디지털이었다.
사장 직속 ‘해양DX전략실’을 설치하고 해상운임·친환경 선박연료·선박탄소배출권 등 해양파생상품 거래 기반 조성을 단계적으로 추진 중이다. 토큰증권(STO)을 활용한 친환경 선박 조각투자 도입, 해양파생상품거래소 2028년 개장 기반 구축도 올해 주요 과제로 제시됐다.
지역 협력 측면에서도 보폭을 넓혔다. BNK부산은행·경남은행과 동남권 해양산업 육성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하며 중소선사 보증 지원, 북극항로 인프라 금융 등 협력 체계를 구축했다. 한국산업은행·수출입은행과도 연달아 MOU를 체결하며 정책금융 간 협조 체계를 강화했다.
◆ 기회인가, 더 큰 시험대인가
해수부가 부산에 자리를 잡은 지금, 해진공의 좌표도 달라진다. 그 변화는 이미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해진공은 HMM 지분 35.08%를 보유한 2대 주주로서, 이달 초 해수부·부산시와 함께 ‘이전기업 지원 협의체(TF)’ 첫 회의에 참여했다. HMM은 지난달 30일 이사회에서 본사 소재지를 서울에서 부산으로 바꾸는 정관 변경안을 의결했고, 오는 5월 8일 임시주주총회에서 최종 확정될 예정이다. 해진공이 보유한 지분과 영향력이 국내 최대 해운사의 부산 이전을 가르는 열쇠 중 하나가 된 셈이다. 다만 HMM 육상노조가 교섭 결렬을 선언하고 총파업을 예고하는 등 노사 갈등이 최대 변수로 남아 있다.
그러나 과제도 선명하다. 해수부와 부산 소재 해수부 소속 기관의 조달청 공공구매 가운데 지역업체 계약 비율이 20.1%에 그친다는 지적은 ‘부산 시대’의 온기가 아직 지역 기업 생태계로 고루 스며들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해진공이 금융 허브를 표방하면서도 중소 지역 선사와 해운 기업 지원에 실질적으로 얼마나 기여하느냐가 핵심 검증 지점이 될 것이다.
올해 2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해사국제상사법원 설치법은 부산과 인천 두 곳에 해사전문법원을 두고 2028년 3월 개원을 목표로 한다. 선박금융·해상보험 분쟁을 전담하는 전문 법원의 부재가 오랜 제도적 공백이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첫걸음으로 평가되지만, 부산 해사법원의 관할이 영남·호남·제주로 한정되면서 실질적 영향력이 기대에 못 미친다는 지적도 나온다.
해진공의 가치는 숫자만으로 측정되지 않는다. 한진해운 사태 이후 국가가 해운산업에 만들어준 ‘안전판’이 부산이라는 도시와 함께 어떤 생태계를 만들어낼 수 있느냐, 그것이 지금 해진공에게 던져진 진짜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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