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아직 중동전쟁이 끝나지 않아 외환·금융시장이 충분히 안정되지 못한 채 자리를 넘기게 돼 마음이 무겁다. 아시아가 제일 영향을 받는다. 원유를 못 받으면 서플라이 체인(공급망)이 다 영향받는다."
중동 불안과 미국발 관세 전쟁, 고환율·가계부채 리스크에 12·3 비상계엄까지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4년 내내 전쟁 같은 위기의 연속 속에서 임기를 마쳤다.

이 총재는 20일 이임식 직후 기자들과 만나 최근 G20 재무장관·중앙은행총재 회의가 열린 워싱턴 방문 당시를 회상하며 "지금 미국발 불확실성이 어떻게 진정될지 아무도 모르겠다는 분위기지만, 이번 사태는 아시아가 가장 큰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때는 유럽이 가스 문제로 고생했지만 제조업 서플라이 체인 영향은 크지 않았다"며 "아시아는 원유가 안 들어오면 항공유부터 각종 제조업까지 서플라이 체인 전체가 영향을 받는 구조"라고 부연했다.
앞서 진행된 이임사에서 이 총재는 "아직 중동전쟁이 끝나지 않아 외환·금융시장이 충분히 안정되지 못한 채 자리를 넘기게 돼 마음이 무겁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지난 4년은 우리가 예상했던 범위 안에서의 시간이 아니라, 그 경계를 끊임없이 넘어야 했던 시간이었다"고 4년을 돌아봤다.
그럼에도 이 총재는 "주요 중앙은행보다 먼저 인플레이션을 2%대 목표 수준으로 되돌린 것, 20여년간 상승하기만 했던 가계부채 비율을 처음으로 하락세로 이끈 것"을 의미 있는 성과로 꼽았다. 한국형 포워드 가이던스 도입, BIS 글로벌금융시스템위원회(CGFS) 의장 선임 등도 재임 기간의 성취로 언급했다.
지난 2022년 4월 취임 당시 러·우 전쟁 여파로 인플레이션이 치솟자 역사상 처음으로 두 차례 빅스텝을 단행, 기준금리를 1.75%에서 3.5%까지 끌어올렸다. 또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 사태로 금융안정까지 위협받았다. 이후 수도권 집값 급등과 가계부채 증가에 대응하는 와중에 12·3 비상계엄이라는 초유의 상황이 터지며 경제가 역성장하기도 했다.
취임 전 '조용한 절간'으로 불리던 한국은행은 이 총재 재임 기간 '발언하는 중앙은행'으로 탈바꿈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총재는 △부동산 △가계부채 △서울대 입시 지역 할당제 등 통화정책 밖 영역까지 적극 목소리를 높이며 '오지랖 총재'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이임사에서도 그는 "'시끄러운 한은'을 함께 만들어 준 연구자 여러분께 감사드린다"고 직접 언급하기도 했다.
지난 10일 마지막 금통위 직후 기자 간담회에서는 현재 통화정책 방향을 묻는 말에 "금리를 변동 안 시키는 것도 굉장히 중요한 결정"이라고 강조했다. "금리를 안 올릴 때는 안 올리는 것도 굉장히 큰 용기"라는 말도 덧붙였다.
이 총재는 자신의 임기를 되돌아보며 "실수도 많았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으면서도 "금리 결정과 관련해서는 후회스러운 부분이 없다"고 전했다. 더불어 "조기 인하에 신이 됐다는 분들이 많았고, 지나고 나면 금리를 너무 안 올려 환율이 이렇게 됐다고 비난하는 분도 많다. 양쪽이 공격하니 잘했구나 생각한다"고 피력했다.

이 총재가 진짜 후회되는 순간으로 꼽은 건 '정책기조 전환' 발언 파장이었다. "지난해 11월 인터뷰에서 인하 기조가 계속되지 않을 수 있다고 했는데, 언론사에서 전부 인상으로 받아들이면서 시장금리가 많이 올라가 혼란이 생겼다"며 "그다음부터는 그냥 얘기하지 말자는 생각이 들었다"고 토로했다.
이어 가장 보람 있었던 순간으로는 주저 없이 12·3 비상계엄 직후를 꼽았다. "계엄 직후 정말 전화를 많이 받았다. 그날 외신 인터뷰를 하면서 만든 논리가 '과거 두 번의 경험을 보면, 헌재가 제대로 작동하면 경제와 정치가 분리된다'는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이 총재는 "하나님이 나를 이 일을 하라고 보내셨구나 하고 느꼈다"며 "내가 오래 해외에 있었던 경험이나 관계 때문에 기여를 했다라고 하면, 그게 제 기억에 남는 것"이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때 금융 안정을 고려해서 안 낮춘다고 얘기했는데도 한동안 계속 실기했다는 얘기가 많았다."
이 총재는 가장 어려웠던 시기로는 2024년 중반 금리 인하를 둘러싼 논쟁을 꼽았다. "물가는 2%인데 왜 금리를 안 내리냐, '실기했다'는 얘기가 계속 나왔다"고 했다. 헬스클럽 사우나에서 운동 중에도 '총재님이 금리 빨리 내리셨겠어요'라는 말을 들었다는 일화도 전했다.
그러면서 "지금 거꾸로 생각하면 이후엔 금리를 너무 낮춰서 외환시장과 부동산 시장이 튀었다고 한다"고 말했다.
'서학개미 발언'에 대해서도 입장을 밝혔다. 이 총재는 "내가 잘못을 인정했다, 이런 건 아니다"라고 선을 그으면서 "그때 욕을 먹었지만, 그것을 통해서 국민연금 해외 투자 같은 게 공론화돼 제도가 바뀌었다. 지금 생각하면 다행"이라고 했다.
이 총재는 "환율이 좀 안정된 상태에서 후임자에게 넘기면 일을 잘 마무리했다고 생각하고 나가려 했는데, 트럼프 대통령이 도와주시지 않으셨다"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퇴임 후 거취에 대해선 "3년 취업 제약이 있어 국내에 당분간 있을 것 같다"면서 "연구뿐만 아니라 경제 평론과 자문을 하고 싶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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