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위크=김두완 기자 자원이 곧 안보가 되는 시대가 도래했다. 반도체와 AI 산업의 확산 속에서 핵심광물은 더 이상 단순한 원자재가 아니라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전략 자산으로 자리 잡고 있다. 미국이 주도하는 ‘팍스 실리카(Pax Silica)’ 출범은 이러한 변화를 시장 논리가 아닌 동맹과 안보의 문제로 재정의한 사건이다. 공급망을 둘러싼 선택이 이제 기업의 판단을 넘어 외교와 안보의 영역에서 결정되는 국면에 접어들었다. 문제는 참여 여부가 아니라, 이 질서 안에서 한국이 어떤 역할을 준비하고 있느냐다.
◇ 한국이 준비해야 할 공급망 전략
글로벌 공급망은 오랫동안 비용과 효율을 기준으로 작동해 왔다. 기업은 가장 싸고 안정적인 조달처를 찾아 생산 체계를 구축했고, 국경의 의미는 상대적으로 희미해졌다. 그러나 코로나19 팬데믹과 미·중 전략 경쟁, 지정학적 갈등을 거치며 이러한 전제는 빠르게 흔들렸다. 특정 국가에 대한 의존도가 높을수록 공급 차질이 산업 전반의 리스크로 확산되면서 공급망은 기업 차원을 넘어 국가가 관리해야 할 안보 의제로 부상했다.
이 같은 변화가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분야가 핵심광물이다. 핵심광물은 대체가 어렵고 생산과 정·제련이 일부 국가에 집중돼 있어, 공급이 흔들릴 경우 반도체·배터리·AI 등 첨단 산업 전반의 생산 흐름에 연쇄적인 영향을 미친다. 원유처럼 전략 비축이 가능한 자원과 달리 다수의 광물은 단기간에 공급선을 전환하기도 쉽지 않다. 그 결과 특정 국가의 수출 통제나 정책 변화가 곧바로 글로벌 산업 지형을 흔드는 구조가 형성됐다.
주요국이 핵심광물을 전략 자산으로 재정의한 배경도 여기에 있다. 자원의 안정적 확보 여부가 기술 경쟁력과 안보 역량을 동시에 좌우하는 상황에서 공급망을 시장에만 맡겨둘 수 없다는 인식이 확산됐다. 미국을 비롯한 주요국이 핵심광물 정책을 무역이나 산업 정책이 아닌 국가안보 차원에서 다루기 시작한 것도 이러한 흐름과 맞닿아 있다. 팍스 실리카 역시 이 같은 인식 전환 속에서 등장한 대응 전략으로 해석된다.
팍스 실리카는 특정 광물 확보에 국한되지 않고, 채굴부터 정·제련, 첨단 제조, AI 서비스에 이르는 전 주기를 동맹국 중심으로 묶겠다는 구상을 담고 있다. 핵심광물 공급망을 시장 자율에 맡기기보다 신뢰 가능한 국가 간 협력 틀 안에서 관리하겠다는 취지다. 중국을 중심으로 형성된 글로벌 광물 공급 구조에 대응하려는 성격도 뚜렷하다.
다만 팍스 실리카는 법적 구속력을 지닌 조약이라기보다 협력의 방향과 기준을 제시하는 프레임워크에 가깝다. 참여국들이 동일한 목표를 공유하더라도 각국이 맡게 될 역할과 부담은 다를 수밖에 없다. 결국 이 체제에서의 위상은 참여 여부보다는 공급망에서 어떤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지에 따라 갈릴 것으로 보인다.
이 지점에서 한국의 위치는 복합적이다. 한국은 반도체와 배터리, 첨단 제조 분야에서 경쟁력을 갖춘 국가로, 동맹국 입장에서 신뢰할 수 있는 협력 파트너로 평가된다. 미국이 가공 핵심광물과 파생상품을 국가안보 사안으로 격상시키는 흐름 속에서, 한국은 기존 공급 이력과 기술력을 바탕으로 협력 기회를 확대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가능성은 한국 경제의 구조적 한계를 전제로 한다. 한국은 광물 수요의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으며, 수입 물량의 상당 부분이 이미 정·제련된 가공품 형태다. 이는 국내에 상업적 규모의 정·제련 기반이 취약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공급망의 중간 단계가 해외에 놓인 구조에서는 상류 차질이 발생할 경우 하류 산업 전반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와 관련해 국회입법조사처는 4일 ‘팍스 실리카 출범과 핵심광물 공급망 혁신방안’ 보고서를 통해 한국이 직면한 공급망 리스크와 대응 과제를 정리했다. 보고서는 글로벌 자원 패권 경쟁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동맹 참여만으로는 공급망 안정성을 담보하기 어렵다고 지적하며, 대외 의존도가 높은 국내 공급망 구조가 외부 충격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고 분석했다.
이어 보고서는 팍스 실리카 체제에 실질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제도적 기반에 대한 점검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동맹국 간 협력이 실제로 작동할 수 있도록 ‘대외무역법’ 정비를 통해 규제 체계의 호환성을 높이고, ‘국가자원안보 특별법’을 중심으로 정·제련 등 취약한 중간 단계에 대한 재정 지원과 안보 관리 체계를 보완할 필요성을 제시했다. 이는 물리적 자원의 한계를 기술 경쟁력으로 보완하는 이른바 ‘기술의 자원화’를 통해 팍스 실리카 시대에 한국의 역할과 국익을 확장하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 설명된다.
보고서는 팍스 실리카를 단순한 기회로만 볼 수 없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공급망이 안보의 영역으로 재편되는 상황에서 구조적 취약성을 해소하지 않은 채 협력에 참여할 경우, 외부 변수에 대한 노출이 오히려 커질 수 있다는 것이다. 공급망 내에서 맡는 역할에 따라 협상력과 발언권에도 차이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도 함께 지적된다.
따라서 논의의 초점은 팍스 실리카 참여 여부보다 참여 이후를 어떻게 준비할 것인지에 맞춰지고 있다. 동맹국 간 협력이 실질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전략물자 교역 과정에서 규제의 상호 운용성이 확보돼야 하고, 국내 산업 기반 역시 일정 수준의 회복력을 갖춰야 한다는 분석이다. 특히 정·제련과 가공 단계는 단기간 성과를 내기 어렵지만 공급망 안정성과 협상력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로 꼽힌다.
팍스 실리카는 한국에 선택을 요구하고 있다. 동맹 참여를 통한 단기적 기회에 머물 것인지, 아니면 공급망의 중간을 보완해 장기적 역할을 설계할 것인지의 문제다. 자원이 곧 안보가 된 시대, 대비 없는 참여는 구조적 한계를 고착시킬 수 있다. 한국에 남은 과제는 공급망의 빈 고리를 메우고, 동맹 속에서 맡을 역할을 분명히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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