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충남 태안군 원북면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지난 2일 또 한 명의 하청노동자가 숨졌다.
한낮의 햇볕이 내리쬐던 지난 5일 오후, 사고가 발생한 발전소 내 기계공작실 앞엔 여전히 침묵이 맴돌고 있었다. 작업장 앞에 놓인 공업용 선반 기계는 멈춘 채 침묵하고 있었고, 동료들의 발길도 끊긴 듯 고요함만 감돌았다.
현장 근처엔 작은 국화꽃 한 다발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충현아, 미안하다'는 글귀가 적힌 손팻말이 누군가의 가슴처럼 눌려 있었다. 이곳은 2018년 6년 전 고(故) 김용균 씨가 숨졌던 바로 그 자리다. 이곳에서 또 한 명의 하청노동자의 비극이 되풀이됐다.
50대 하청노동자 김충현 씨는 지난 2일 오후, 이곳에서 혼자 공업용 선반을 돌리다 기계에 끼여 숨졌다. 사고 당일 김씨가 작업 오더도 없이 작업 중이었다는 원청의 주장과 달리, 직접 작성한 '작업 전 안전회의 일지'에는 원청 직원의 서명까지 있었다.
"KPS 직원이 서명한 걸로 봐선, 고인의 작업을 알고 있었던 것" 사고대책위 관계자의 말이다.
작업장 안으로 들어가니 낡은 공작기계들과 공구들이 어수선하게 정리돼 있었다. 기계 옆 작은 탁자 위에는 미처 끝내지 못한 작업표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고인은 사고 당일 '시엔피 벤트 밸브 핸들 제작' 작업을 맡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발전기 냉각장치의 부품 제작이었다.
이곳을 처음 찾은 시민단체 활동가 정모 씨는 "6년 전 용균이도 혼자였고, 이번에도 혼자였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그때 약속했던 2인 1조 작업, 안전인력 확충, 다단계 하청 철폐는 다 어디 갔냐"고 울분을 터뜨렸다.
기계실 외부에는 경찰과 고용노동부 관계자들이 출입을 통제하며 사고 현장을 조사 중이었다. 안전모를 쓴 조사관들이 한참동안 CCTV 위치와 기계 작동상태를 확인하고 있었다.
경찰은 "중대재해처벌법 위반 여부를 포함해 철저히 수사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현장 노동자들은 신뢰하지 못하는 눈치다.
"용균이 죽고도 안 바뀌었는데, 이번이라고 다르겠어요?" 현장 근처 식당에서 만난 한 협력업체 직원은 이렇게 말했다. 그는 "안전교육이요? 대충 서명만 받아요. 누구도 진짜 교육 받는 건 없어요. 작업도 말로 시켜요, 문서 남기면 책임질까봐"라며 목소리를 낮췄다.
노동자들이 모여 담배를 피우는 휴게실 옆, 벽에는 '안전 제일'이라는 붉은 글씨가 걸려 있었다. 그러나 그 문구는 오래전 색이 바래 형체조차 희미해졌다. "지켜지는 '안전'이면 좋겠어요. 하지만 현실은 저 문구처럼, 바래버린 안전이죠."
한편, 사고 발생 나흘째인 6일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앞에서 고 김충현 씨 유족과 사고 대책위원회가 대통령비서실에 진상조사와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는 요구안을 전달했다. 이날 현장에는 강훈식 대통령비서실장이 직접 나와 유족의 손에서 서한을 수령했다. 대통령비서실장이 산업재해 유가족의 요청서를 직접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강 실장은 "중대재해처벌법 등 적용 여부를 포함해 엄중한 법적 책임을 검토하고, 특별근로감독에 준하는 조치를 취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협력업체 노동자들이 겪은 트라우마에 대해서도 정부 차원의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덧붙였다. 현장을 떠나기 전, 그는 손으로 눈물을 훔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고 김용균 씨 어머니 김미숙 씨는 "그때 했던 약속이 아직도 지켜지지 않고 있음을, 충현이의 죽음이 다시 보여주고 있다"며 "제발 이번 대통령만은 믿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눈물로 호소했다. 또한, 현장에서 만난 공공운수노조 관계자는 "충현 씨는 절대 임의로 기계를 작동한 게 아니다. 이 구조가 만든 죽음이다. 발전소 안 하청은 위험을 전가받는 자리이자, 죽음의 자리다"라고 말했다.
대책위는 "원청 책임 회피, 형식적 안전점검, 다단계 하청이라는 구조적 문제가 또 한 명의 죽음을 만들었다"며 "이번만큼은 대통령과 정부가 직접 나서 근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태안화력발전소는 2018년 김용균 씨 사망 이후 '특별노동안전조사위원회' 권고에 따라 구조개선이 논의됐으나, 하청구조와 불안정 고용은 여전한 상태다.
기자는 취재 과정에서 한 현장 노동자의 말을 잊을 수 없다. "그때는 용균이었고, 이번엔 충현이었습니다. 그 다음은 누가 될까요?" 이 물음에 우리는 더 이상 답을 미뤄서는 안 된다. '산업재해'라는 단어 뒤에 숨겨진 구조적 살인을 외면하는 사회에, 또 얼마나 많은 김충현이 필요한가.
'죽음의 컨베이어벨트'가 '죽음의 선반기계'로 바뀌었을 뿐, 현장은 달라지지 않았다. 진심이 담기지 않은 약속은 결국 기록만 남기고, 또 한 명을 앗아갔다. 반복되는 죽음에 정부의 응답은 이제 더는 '조사'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이제는 책임 있는 변화가 필요하다. 진심으로 달라지겠다는 약속이 '또 다른 희생'의 조건이 되어선 안 된다. 현장은 아직도 차갑고, 시간은 여전히 거꾸로 흐른다. 그리고 오늘도, 또 다른 충현이들이 그 기계 앞에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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