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라임경제] #1. 대구 달성군에서 부품 제조업체를 운영하는 박모(58) 대표는 최근 은행 대출 상담을 받으러 다섯 곳을 돌았지만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규제가 완화됐다더니, 은행들은 오히려 심사를 더 깐깐하게 본다"며 "급한 자금은 결국 고금리 대출로 메워야 할 판"이라고 하소연했다.
#2. 수도권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이모(54) 씨도 사정은 비슷하다. 장기화된 매출 부진에 운전자금 대출을 신청했지만, 은행 문턱은 높기만 했다. 이 씨는 "정부는 지원을 늘린다고 하지만 정작 창구에서는 다 거절당한다"며 "2금융권이라도 알아봐야겠다"고 털어놨다.
정부가 자본 규제를 풀어 은행 대출 여력을 높였지만, 중소기업 창구는 더 좁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시중은행들은 대출 확대 대신 건전성 방어를 택했고, 유일하게 기업은행만이 중기 대출을 늘리며 버팀목 역할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연체율 상승이 이어지면서 실물경제를 뒷받침할 정책적 보완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30일 금융권에 따르면 국민·신한·하나·우리·농협은행 등 5대 시중은행의 중소기업 대출 잔액은 올해 1분기 기준 540조7312억원으로 집계됐다. 이는 지난해 말 542조91억원과 비교해 약 1조3000억원 줄어든 수치다. 지난해 12월 중 환율 급등 이후 대출 축소 기조가 이어지면서 올해 1분기 누적으로는 약 7조3000억원이 빠졌다.
특히 성장성 높은 기업을 대상으로 한 기술신용대출도 예외가 아니다. 4대 은행의 기술금융 대출 잔액은 같은 기간 약 6조원 감소했다. 개인사업자(소호) 대출 역시 1분기 동안 1조1000억원 이상 줄어들며 역성장으로 전환됐다.
이는 지난해 1분기 중소기업 대출 증가액인 약 9조원에 비하면 10분의 1 수준에 불과한 결과다. 수요는 여전하지만, 자금 공급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은행권이 중소기업 대출을 조이는 배경에는 자본건전성 관리가 자리하고 있다. 특히 은행의 재무 건전성을 보여주는 핵심 지표인 보통주자본비율(CET1) 을 유지하기 위해 신중한 대출 전략을 택한 것으로 풀이된다.
CET1 비율은 은행이 손실을 흡수할 수 있는 능력을 나타내는 지표로, 높을수록 금융사고나 시장 충격에 견딜 여력이 크다는 의미다. 지난해 말 금융당국은 은행들의 자본 부담을 줄이기 위해 일부 외환 관련 자산을 위험가중자산(RWA) 계산에서 제외해주는 조치를 시행했다. 이 덕분에 시중은행들의 CET1 비율은 0.1~0.2%포인트(p) 높아졌다.
하지만 원·달러 환율이 1480원대까지 치솟으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환율이 오르면 외화표시 자산의 원화 환산 가치가 증가하고, 위험가중자산도 함께 늘어나 CET1 비율이 다시 떨어지게 된다.
금융권에서는 환율이 10원 오를 때마다 CET1 비율이 최대 0.03%p 하락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결국 은행들은 CET1 비율을 방어하기 위해 위험이 큰 중소기업과 개인사업자 대출부터 관리에 나섰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환율 불확실성이 이어지는 상황에서는 중소기업 대출을 무리하게 늘리기보다 건전성 관리를 우선할 수밖에 없다"며 "특히 배당과 자사주 매입 등 주주환원 정책도 고려해야 하는 만큼 대출 확대는 신중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문제는 수요가 줄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은행이 최근 발표한 '금융기관 대출행태 서베이'에 따르면 2분기 중소기업 대출 수요지수는 25로 1분기(19) 대비 상승했다. 대기업(11)을 웃도는 수준이다.
반면, 대출 심사 기준은 더욱 강화됐다. 2분기 은행권 대출태도지수는 -6을 기록하며, 전분기(+7) 대비 13p나 하락했다. 이는 은행들이 대출을 보다 엄격하게 심사하겠다는 의미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경기 둔화와 관세 불확실성 속에 중소기업 연체율이 오르고 있어, 대출 심사를 보수적으로 가져가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국책은행인 IBK기업은행은 중기대출 확대 기조를 유지하며 시장 점유율을 넓히고 있다. 올해 1분기 말 기준 기업은행의 중소기업 대출 잔액은 252조4936억원으로 전년 말 247조1921억원 대비 2.14% 증가했다. 점유율 역시 23.65%에서 24.18%로 확대됐다.
기업은행은 경기 불확실성이 커지는 상황에서 중소기업 금융 지원을 본연의 책무로 삼고 대출을 늘려왔지만 연체율 상승세가 부담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기업은행의 지난해 말 중기대출 연체율은 0.83%로 전년 말 0.64% 대비 0.19%p 높아졌다. 이는 최근 10년 중 가장 높은 수준이다.
은행권의 대출 축소가 장기화될 경우, 자금 사각지대에 놓인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들이 2금융권 고금리 대출이나 불법사금융으로 이동할 가능성이 높아질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특히 신용도가 낮은 취약 차주일수록 상대적으로 높은 금리 부담을 감수할 수밖에 없어 금융 부실이 확대될 위험이 크다.
실제 금융권 일각에서는 "실물경제로 가야 할 자금이 위축되면 시장 외곽에서 위험이 증폭될 수 있다"며 "정책금융과 민간금융 사이의 연결 고리가 약해질수록 취약층 부담은 커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금융당국은 은행권의 중소기업 대출 확대를 유도하기 위해 자본규제 인센티브 방안을 검토 중이다. 위험가중자산 기준을 조정하거나, 기업은행을 중심으로 정책금융을 강화하는 방안이 거론된다.
하지만 단순한 규제 완화만으로는 실질적인 자금 공급 확대가 쉽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경기 둔화와 신용위험 증가라는 본질적 리스크가 해소되지 않는 한, 은행의 보수적 태도는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금융권 한 관계자는 "건전성 관리와 실물경제 지원이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는 리스크 부담을 완화해주는 정책적 뒷받침이 필수"라며 "중소기업이 자금난으로 사금융으로 내몰리는 상황은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comment--
첫 번째 댓글을 작성해 보세요.
댓글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