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태규 칼럼-국제정세의 진실] 미국에게 한국보다 중공이 더 중요했다…트루먼의 특사 제섭과 한국전쟁의 운명<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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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태규 서울외국어대학원대학교 특임교수
대한민국은 한국전쟁 5개월 전에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보낸 필립 제섭 특명전권대사의 실체를 몰랐다. 트루먼은 물론 국무장관 딘 애치슨도 몰랐다. 그러니 전쟁이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지 몰랐다. 미국이 한반도 통일을 위해 참전하지 않았다는 것도 몰랐다. 미국에게 중공이 한국보다 더 중요했다는 것도 몰랐다.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에게 얼마나 많은 전쟁 제한조치가 내려졌는지 몰랐다.


미국이 끌고 간 한국전쟁은 ‘승리를 위한 전쟁’이 아니었다. 공산주의자들의 공격만 막는 ‘제한전쟁’이었다. 이겨서 전쟁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 외교협상으로 전쟁을 마무리하는 것이 미국의 의도였다. 특사 제섭은 미국의 그런 전쟁 정책을 설정하고 추진한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 맥아더는 이를 반대하며 백악관 등과 끊임없이 싸워야 했다. 제섭의 방한은 한반도 비극의 불길한 전조였다. 그러나 한국이 제섭을 알지 못한 것은 더 큰 비극이었다.

제섭은 미국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세력의 대부였다. 한국에서 종북좌파들을 조종한다고 알려진 특정 인물들과 비슷하다. 그와 손발을 맞춘 애치슨도 사회주의자였다. 그들을 중용한 트루먼도 사회주의자였다. 그는 한국엔 ‘투철한 반공’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스탈린의 공산주의를 배척했을 뿐. 모택동의 공산주의에는 관대했다. 미국에서는 ‘냉전 좌파’로 불린다.

그런 제섭에게 대한민국의 명사들은 학교 재정난에다 영어교육 어려움까지 호소하며 도와달라고 했다, 무지한 탓인가? 순진한 탓인가? 제섭은 어떤 답도 내놓지 않았다.

제섭은 이승만 대통령과 4차례 만났다. 두 사람은 원조, 인플레이션, 태평양 협정 등에 논의했으나 지극히 평범한 수준에 그쳤다. 북한정세 등 전쟁을 예감할 수 있는 대화가 전혀 없었다. 특히 제섭이 방한 중 미국이 발표한 ‘애치슨 라인’에 대해서도 논의한 흔적이 없다. 그 의미를 몰랐던 것일까? 한국정부의 준비는 너무나 부족했다. 주미 대사관·외무부 등은 큰 책임을 통감했어야 했다.

■애치슨 라인은 제섭의 작품

1949년 제섭은 애치슨의 요청으로 새로운 아시아 정책을 구상했다. 앞으로도 대만을 도울 일은 없다고 결론지었다. 중공이 미국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일은 없을 것이란 전제에서였다. 세계 공산주의와도 안정관계를 유지할 것으로 낙관했다. 무능·부패한 장개석 정부는 미국 안보에 전략 가치가 전혀 없다는 것. 중공을 강력하게 지지했던 제섭으로서는 당연한 판단이었다.

그는 한국을 다녀간 뒤 이승만정부가 독재정권이며 무능하다고 보고했다. 제섭 세력은 똑 같은 이유를 대며 장개석 정부를 무너트렸다. 모택동에 중국을 넘겨주었다. 그 보고는 미국이 대만처럼 남한도 버릴 수 있음을 내포한 것. 한국전쟁 과정에서 그 의도가 드러났다. 한국을 태평양 방위선에서 뺀 ‘애치슨 라인’은 제섭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제섭이 의장인 ‘태평양관계연구소: IPR)’ 기관지 편집장이 ‘애치슨 라인’을 공개 지지한 것은 이를 뒷받침한다.

IPR은 친 중공 조직들과 모택동신화 선전에 앞장섰다. 한국전쟁 때는 중공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강연·기고 활동을 했다. IPR 연구원이며 중국공산당 비밀당원 지차오딩은 중국 내전 때 재무부의 솔로몬 애들러 등 미국 관리 2명과 중경에서 함께 하숙했었다. 애들러는 소련 스파이. 그는 같은 조직원이었던 재무부 차관보 해리 화이트 등과 국민당 정부의 인플레이션 억제를 돕기 위한 미국의 ‘금 대출 계획(2억 달러어치)’을 무산시켰다. 결국 국민당 정부는 인플레이션에 발목이 잡혀 무너졌다. 화이트는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 창설 주역이었다.

트루먼은 소련 간첩이란 FBI의 보고를 무시하고 화이트를 IMF 이사에 임명했다. 그가 공산주의자 제섭과 화이트를 중용하고 역시 좌파인 애치슨을 국무장관에 기용한 것은 이념 때문. 하원 위원회는 “트루먼은 미국 공산주의에 관해 거의 의도적으로 둔감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국내정치에서 민주당 좌파전통을 이어받았다. 대표 좌파정책은 국민의료보험. 미국의학협회가 “사회주의화 의료”라며 강력 반대해 무산됐다. 뒷날 린든 존슨 대통령이 가난 등을 없앤다며 내건 ‘위대한 사회’ 역시 사회주의 정책. 트루먼이 1948년 발표했다가 내전이 일어날 정도로 반발이 심해 거둬들인 것이었다.

그는 스탈린을 싫어 해 소련 봉쇄를 최우선 외교정책으로 삼았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영향 때문. 루즈벨트는 스탈린과 2차 대전 동맹관계였다. 그러나 원자탄 기밀을 빼내는 등 배신했다며 스탈린과 척을 졌다. 그래서 친소였던 현직 부통령 대신 트루먼을 부통령에 선택했다. 트루먼이 스탈린의 공산주의를 반대한 것도 그 이유가 컸다.

사회주의자 트루먼은 반공 때문에 ‘냉전 좌파’로 불린다. 그러나 모택동 공산주의는 개의치 않았다. 제섭, 애치슨 모두 친 중공. 트루먼의 한국전쟁 정책은 친 중공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중공을 막아야 극동에 평화가 온다는 맥아더에게 한국전을 맡길 수 없었다. 그를 끌어내릴 수밖에 없었다.

제섭은 미국의 한국전쟁 정책결정 과정에 깊이 관여했다. 50년 10월 웨이크 섬 트루먼과 맥아더 회담에 배석했다. 51년 1월 백악관에서 트루먼이 주재한 미군 제주 철수계획 논의에도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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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앞서 제섭은 50년 9월 국무부 고위간부들, 영국 외무부 간부, 소련 간첩 가이 버지스 주미 영국 대사관 서기관 등과 한국전쟁 방향을 논의했다.

두 나라는 맥아더에게 대만이 중공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하고 만주 정찰비행·수풍화력발전소 공격·소련무기 집하지 나진폭격 등을 금지하는 지시를 내리기로 했다. 미국은 영국과 논의 없이 만주 등에 대한 공격을 하지 않겠다고 영국에 약속했다. 영국은 중공의 침공을 완화하기 위해 북한 일부를 중공에게 ‘완충지역’으로 주는 방안도 제시했다.

이어 제섭은 12월 트루먼과 영국 수상 클레맨트 애틀리의 회담에도 배석했다. 두 정상은 영국과 홍콩의 무역 관계를 고려해 중국 해안을 봉쇄하지 않으며 미국은 영국과 협의 없이 원자폭탄을 사용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영국은 일본을 독일처럼 분할하고자 했다. 금융 식민지로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영국의 모든 의도를 반대했다. 한국전쟁 때 영국의 맥아더 방해는 극심했다. 맥아더 해임은 영국의 압력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은 동전 한 푼의 가치도 없다”

한국전쟁의 분수령이 된 맥아더 해임 직전에 열린 50년 12월1일 펜타곤 회의는 한국전쟁의 향방을 결정한 중요한 회의였다. 미국 전쟁정책 결정자들의 한국에 대한 인식이 그대로 드러났다. 제섭 등 국무부·국방부 고위관계자들이 대거 참석했다.

애치슨은 맥아더의 잘못 때문에 미국정부가 비난을 받고 있으며 유럽·아시아와 미국의 단결이 깨졌다고 포문을 열었다. 그를 제거하기 위한 포석. 애치슨은 중공군에 대한 반격은 프라이팬에 기름을 붙는 격이라 했다. ‘맥아더의 전쟁’을 극도로 제한해야 한다는 의미. 애치슨은 종전을 수용하고 전쟁 전 상황인 38선 분단으로 되돌아가는 것에 대한 의견을 주문했다. 누구도 한국을 지키고 한반도를 통일시켜야 한다는 의견을 내지 않았다.

육군참모총장 조셉 콜린스: “중공에 대한 폭격은 자제해야 한다. 한국을 지키자는 주장에 반대다. 한국은 동전 한 푼의 가치도 없다.” CIA 국장: “한국으로부터 빠져 나와야 한다.

참석자 모두 중공에 적대적이지 않았다. 한국·대만을 일고의 가치도 없는 곳으로 간주했다. 국방차관의 회의 요약: 1) 한국은 미국을 위한 중요한 지역이 아니다. 2) 당분간 시간을 벌며 종전 또는 휴전을 해야 한다.

사실상 한국 포기였다. 당시 미국의 정책결정자에게 한반도에서 공산주의자들을 몰아 내 남한 주도 체제를 만드는 의도는 전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전에 관한 미국의 정책결정이나 전쟁정보는 모두 영국 정부에 제공되었다. 그리곤 상당 부분 중공에 건네졌다. ‘캠브리지 5’라는 영국 캠브리지대 출신 간첩들을 통해 소련을 거쳐 중공에 간 것이다. 워싱턴 주요 기관의 친중 공산주의자나 동조자들이 바로 중공에 제공했을 가능성도 매우 높다. 제섭은 이들과 두루, 깊이 관련되어 있었다.

중공군 사령관 임표는 압록강 폭파 금지에서부터 핵무기 사용 조건까지 맥아더에 대한 모든 제한 조치를 다 알고 있었다고 인정했다: “우리의 공급과 통신망에 대한 맥아더의 공격을 워싱턴이 제한한 것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면 결코 우리 군대의 인명과 명성을 걸면서 까지 공격하지 못했을 것이다.” 미국 안팎의 스파이들 덕분에 중공과 소련은 위험 부담이 없는 전쟁을 했다.

맥아더는 유엔군의 모든 작전을 중공이 꿰뚫고 있었다고 개탄했다. 자신에게 내려진 각종 제한 조치를 중공이 몰랐다면 결코 한국전에 개입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백악관 등은 중공의 공격을 전쟁행위로 취급하지 말고 입 다물 것을 맥아더에 요구했다.

51년 3월 맥아더는 백악관·유엔이 ‘명백한 승리’ 대신 외교 해결에 기울기 시작하자 성명을 발표, “중공에 유엔의 한 자리를 내주는 보상이 될 것”이라고 반대했다. 트루먼은 4월11일 맥아더가 미국·유엔의 한국전쟁 정책을 지지하지 않는다며 해임했다. 맥아더는 “잔인하게 희생당하고 있는 한국과 한국인들이 가장 큰 걱정”이라며 미국으로 돌아갔다.

맹방·혈맹으로 믿었던 미국은 사실 한국은 안중에도 없었다. 대한민국에게는 배신이었다. 한국은 눈앞에 나타난 제섭을 몰랐듯 미국에 대해 캄캄했기 때문에 당한 것이다. 적도 알아야 하지만 이른바 우호국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 나라가 생존할 수 있다. 한국전쟁이 대한민국에 주는 뼈아픈 교훈이다.

 

[손태규 서울외국어대학원대학교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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