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위크=이미정 기자 오늘날 현대인의 삶은 디지털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디지털 공간에서 소통, 업무, 소비, 창작, 투자, 비즈니스 등 다양한 활동이 일어난다. 이러한 개인의 삶과 그 흔적은 온라인 공간에 쌓이고 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디지털 정보와 다양한 자산 형태가 만들어진다. 사후 이러한 디지털 정보와 자산을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문제가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지만, 국내에서 이를 규정하거나 포괄하는 법은 부재하다.
◇ 법안 발의 이어졌지만 ‘디지털 유산’ 관련 입법 논의 공회전
국내에서 ‘디지털 유산’ 처리 문제가 수면 위로 부상한 시기는 2010년이다. 당시 천안함 피격사건으로 희생된 해군 장병들의 유가족이 고인(故人)의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접근하게 해달라고 요청하면서 이 문제가 처음 공론화됐다. 당시 싸이월드 운영사였던 SK커뮤니케이션즈는 개인정보 보호와 관련 규정 부재를 이유로 유족 요청을 거부했다.
당시 이 사건을 계기로 국회에선 처음으로 ‘디지털 유산’ 관련 법안이 발의됐다. 18대 국회 시기인 2010년, 당시 유기준 의원은 고인의 디지털 정보에 대한 유족의 접근 및 처리 권한 보장하는 법안(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했다. 당시 박대해 의원, 김금래 의원이 유사한 취지의 법안을 발의해 입법 논의 활성화가 기대됐으나 법제화는 불발됐다. 이후 19·21대 국회에서도 디지털 유산 관련 법안이 발의됐지만,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자동 폐기됐다.
현재 22대 국회에서도 디지털 유산 관련 법이 다수 발의된 상태다. 2024년 12월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유가족이 희생자의 부고를 알리기 위해 카카오톡 등 SNS 데이터 접근을 요구한 일을 계기로 디지털 정보 승계 및 관리에 관한 제도가 미비한 점이 문제로 부상하자 법안 발의로 이어졌다.
지난해 2월 정준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유가족이 고인의 디지털 데이터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법안엔 고인의 계정에 저장된 연락처, 음성 및 영상 등 작성 정보를 상속인이 승계받을 수 있도록 규정하는 내용이 담겼다. 고인이 생전에 정보 제공을 거부하는 의사를 표시할 수 있는 방안을 함께 마련해 망인의 디지털 인격권도 보호하는 내용도 함께 포함됐다.
또한 지난해 신영대·유동수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유사한 내용의 법률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두 의원은 이용자가 생전에 디지털 유산의 처리 방안을 지정하고 사망 후엔 해당 지정에 따라 처리하는 내용을 담았다.
법안 발의가 십수 년째 이어지고 있지만, 입법 논의 진척 속도는 더디다. 고인의 프라이버시권과의 충돌, 사회적 합의 부재, 기존법과의 충돌 등 여러 이유로 논의 진척 속도를 높이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됐다. 일각에선 먼저, 고인의 디지털 정보의 접근 범위에 대한 사회적 공론화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 다양한 디지털 유산 유형, “세분화된 처리 방안 필요”
박소영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지난해 3월 발간한 ‘고인의 디지털 정보 처리 현황과 과제’ 보고서를 통해 “고인의 디지털 정보에는 프라이버시 보호가 필요한 개인 기록과 유족이 보존할 가치가 있는 콘텐츠, 경제적 가치를 지닌 자산 등 다양한 유형이 존재하므로 이를 일률적으로 규정할 경우 불필요한 법적 충돌이 발생할 수 있다”며 “따라서 고인의 어떤 디지털 정보가 보호돼야 하고 유족이 접근할 수 있는 범위는 어디까지인지에 대한 공론화 과정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박 조사관은 고인의 디지털 정보 유형별 분류하고 처리 방안을 세분화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그는 디지털 정보를 ‘금전적 가치’와 ‘프라이버시 침해’의 정도를 기준으로 분류했다. 예를 들어 사이버머니는 금전적 가치성이 높고 프라이버시 침해성은 낮은 정보고, 이메일 기록은 금전적 가치성이 낮고 프라이버시 침해성이 높은 정보로 분류했다. 수익을 창출하는 SNS 계정은 금전적 가치성이 높을 뿐 아니라 프라이버시 침해성도 높을 수 있고, 공개된 사진은 금전적 가치성과 프라이버시 침해성이 모두 낮은 정보로 분류했다.
박 조사관은 “금전적 가치성이 높고 프라이버시 침해성이 낮은 정보는 상속되도록 하고, 프라이버시 침해성이 높은 정보는 본인의 지정이 있는 경우에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며, 금전적 가치성과 프라이버시 침해성이 모두 낮은 정보는 본인의 지정이 있으면 그에 따르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상속인 또는 법적 권한이 있는 자에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유형별로 다른 접근 방식을 취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고인의 디지털 정보 처리에 대한 별도의 법률을 제정하거나 유형별로 ‘민법’, ‘정보통신망법’ 등 개별 법률을 개정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본인 의사를 존중하는 사전 설정을 위한 제도적·기술적 장치의 필요성도 거론했다. 디지털 정보 관리 정책에서 고인의 의사 존중이 중요한 만큼 이용자가 특정 온라인 정보에 대해 사후 자동 삭제, 상속 지정, 지정된 대리인에게 이전 등의 옵션을 설정할 수 있도록 기술적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는 조언이다. 현재 미국, 프랑스 등은 이와 관련된 입법을 진행했다. 애플, 구글 등 글로벌 플랫폼사가 디지털 정보 처리와 관련해 사전 지정 제도를 도입한 것도 이러한 입법의 영향이다.
◇ “특별법 제정이나 정부 지침 마련, 다양한 대안 검토해야”
디지털 유산은 유형이 다양하고 복잡하다. 재산적 가치와 인격적 가치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데다 기본법 틀에서 명확하기 규정하기 어려운 유형이 존재한다. 일각에선 특정 법 하나만을 개정해서 디지털 유산 처리 기준을 마련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이에 ‘특별법’ 제정을 통해 포괄적인 제도기반이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윤해성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시사위크와’의 통화에서 “디지털 유산 법적 정비를 위해선 여러 개별 법의 정비가 필요하다”며 “민법은 물론 개인정보보호법, 정보통신망법, 지식재산권법, 행정법, 형법 등 여러 법률을 살펴보고 손질해야 하는데 쉽지 않은 일이다. 현재 민사법 차원에서만 일부 진척이 있을 뿐 다른 개별 법은 개정 논의가 미진하다. 그렇다면 각자의 영역을 녹여서 특별법 형태로 대안을 모색해볼 수 있다. 특별법을 만들어서 개인, 사업자 책임, 형사적 책임 조항을 넣어 체계적으로 가는 게 나을 것 같다”고 조언했다.
특별법 제정이 쉽지 않다면 정부 차원의 지침을 만드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윤 연구위원은 “디지털유산의 사후 처리를 포괄할 수 있는 가이드라인이나 지침을 세워 시행을 해보고 기회가 되면 법률로 승격해 제도화를 할 수 있다”며 “급하게 개별 법을 제정했다가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만큼 가이드라인 마련도 하나의 대안으로 검토해볼 수 있다”고 말했다.
디지털 유산에는 생전 개인이 남긴 다양한 정보와 자산이 담겨 있다. 사후 디지털 정보 처리 기준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다양한 사회적 갈등과 문제를 낳을 수 있다. 온라인에 흩어져 있는 디지털 정보는 범죄의 표적이 될 수도 있다. 디지털 사회를 살고 있는 현재, 진지한 고민과 대안 모색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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