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이 내건 ‘호르무즈 해협’ 통항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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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드 쿠제치 주한 이란대사가 26일 서울 용산구 주한 이란 대사관에서 긴급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뉴시스
사이드 쿠제치 주한 이란대사가 26일 서울 용산구 주한 이란 대사관에서 긴급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뉴시스

시사위크=권신구 기자  한 달 가까이 이어지고 있는 전쟁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종전 협상’을 둘러싼 당사국들의 엇갈린 발언은 진의인지 전략인지를 헷갈리게 한다. 최대 원유 수입로가 봉쇄되면서 중동으로부터 원유를 수입해 온 국가들은 비상이다. 아직은 버틸 수 있다지만 전쟁이 장기화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만큼 정부도 속이 탈 노릇이다. 원유 수입 경로 다변화 등을 꾀하고 있다지만 ‘완벽한 대안’이 될 수 없다는 게 문제다.

미국·이스라엘과 이란 간 전쟁 속 우리 선박의 호르무즈 해협 통과 문제는 현재 우리 정부가 직면한 최대 난제다. 에너지 수급 위기가 실물 경제에 악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이란이 한국 선박에 대한 호르무즈 해협 통과 가능성을 언급했다. 단, 조건을 달았다. 미국 및 이스라엘과 관계성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전한 불확실성 속에 정부의 고심도 깊어지고 있다.

사이드 쿠제치 주한 이란 대사는 26일 서울 용산구 주한 이란대사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한국 선박의 호르무즈 해협 통과 가능성을 언급했다. 그는 한국을 ‘비적대국’이라고 규정하며 특히 ‘미국의 제안’에 응하지 않은 것에 대해 감사의 뜻을 밝혔다. 미국이 한국을 포함한 7개국에 제안한 호르무즈 해협 방위 연합군 참여 요구에 즉각적으로 응하지 않고 신중한 태도를 유지한 데 대한 감사로 보인다.

쿠제치 대사는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기 위해선 이란 정부와 ‘사전 협의’가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며 한국 선박의 경우도 이러한 절차를 거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이란 정부가 조현 외교부 장관에게 한국 선박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줄 것을 공식적으로 요청했다는 사실도 전했다. 한국의 경우 이란과 적대적인 관계가 아닌 만큼 호르무즈 항행에 협조할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겨둔 것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26일 충남 한국석유공사 서산 비축기지를 방문해 현장 점검을 하고 있다. (청와대통신사진기자단) / 뉴시스
이재명 대통령이 26일 충남 한국석유공사 서산 비축기지를 방문해 현장 점검을 하고 있다. (청와대통신사진기자단) / 뉴시스

◇ 역대 최대 위기… 정부, ‘에너지 절약’ 당부

문제는 이러한 이란의 제안이 완벽하지 않다는 점이다. 이란 측이 호르무즈 통행을 위한 ‘조건’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쿠제치 대사는 이날 CBS 라디오 ‘박성태의 뉴스쇼’와 인터뷰에서 “현재 미국 기업들과 거래하고 있는 기업들은 전시 상황에서 제재 대상이 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우호적 관계라 하더라도 미국 기업과 연관이 있는 원유, 상품 등을 운반하는 경우는 제재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다. 중동 내 주요 원유 생산지의 경우 미국 자본과 기술이 적지 않게 투입돼 있다는 점에서 상당한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는 셈이다.

우리 정부는 호르무즈 해협 통행과 관련해 이란 측과 협의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란 측이 한국에 요청한 ‘선박 정보’ 역시 현재 정박 중인 배의 안전 조치를 위한 것이란 설명이다. 이러한 정황을 고려할 때 이란 측 메시지의 함의도 유추가 가능하다. 전쟁이 벌어진 상황에 대해 미국에 대한 ‘반감’을 자극하며 이란에 우호적 분위기를 조성하겠다는 의도가 깔린 셈이다. 쿠제치 대사가 이날 기자회견에서 “한국은 미국과 다른 국가들의 합의에 안 들어가길 기원한다”라고 언급한 것도 이러한 분위기를 보여주는 단면이다.

‘종전 협상’을 두고 미국과 이란이 힘겨루기에 나서는 상황에서,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해제될 가능성도 난망하다. 이는 장기적으로 한국 경제에 위험 요소로 평가된다. 산업연구원은 최근 ‘미국-이란 전쟁의 리스크 확산과 한국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에서 국제유가 10% 상승 시 제조업 전체 생산비가 0.71% 증가한다고 진단했다. 전쟁으로 촉발된 에너지 가격 상승이 국내 기업의 제조 원가 상승을 초래하고, 물가를 상승시켜 내수를 위축시킬 수 있다는 평가다.

위기의 상황에 정부는 ‘비상경제대응체제’로 전면 전환하고 상황 관리에 돌입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이날 청와대에서 비상경제점검회의를 주재하고 차량 5부제를 비롯해 대중교통 이용, 에너지 절약 등에 대한 국민들의 협조를 구했다. 이 대통령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게 얽힌 글로벌 공급망 속에서 위험의 위치와 파급 정도를 정확하게 짚어내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라며 “더욱 지혜를 모으고 고통을 나누는 연대가 절실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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