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사 김혜인] 살다보면 상대에게 의도치 않게 실례를 범했는데, 사과하겠다고 다시 그 얘기를 꺼내기엔 괜히 구차하고 어색한 듯해서 넘어가 버리는 일이 있다.
남편과 내가 한 모임에서 만나 연애할 때였다. 그 모임에서 오랫동안 함께 한 이가 언젠가부터 앞머리 측면 일부분만 하얗게 세었다. 영화 <엑스맨>의 캐릭터 '로그'처럼. 일부러 부분 염색을 하는 사람도 있는데 자연히 그렇게 되다니, 참 신기하고 멋스럽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이, 그러니까 당시엔 남자친구가 그에게 직접 말했단다. "어떻게 여기만 하얗게 돼요?" 라고. 그 말을 듣고는 그가 수줍은 듯이 머리카락을 매만졌다고 한다.
다음 모임에 왔을 때는 머리카락을 검은색으로 염색한 모습이었다.
남편은 그저 멋있어서 건넨 말이었는데 그가 민망히 여기게 됐다며 후회했다. 그러나 한 달에 한 번 있는 모임에서 그 얘기를 다시 꺼낼 만하지 않아서 내게만 얘기했다.
남편이 너무나 순박하게, 그래서 어쩌면 어른의 능숙한 화법이 되지 못했을 말투와 어색한 상황이 머릿속으로 그려졌다. 그런 남편이 귀엽게 보였고, 한편으로 나 역시 멋있게 여기던 그의 헤어스타일을 더는 보지 못해 아쉬웠다.
며칠 전 아이도 제 아빠처럼 할머니 앞에서 순박하게 말했다. "할머니 머리는 하얘. 엄마 머리는 까매."
어머님이 일흔을 훌쩍 넘기셨으니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해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요, 당신도 굳이 염색을 해서 흰머리를 감추려고 들진 않았다. 그런데 손주가 그렇게 말하는 걸 들으니 새삼스런 마음이 드신 듯했다.
"내 머리가 그렇게 하얀가?" 어머님은 머리를 만지며 말하셨다.
어머님이 오해하지 않길 바라며 "좋아서 그런 거예요" 하고 알려드렸다. 실제로 아이는 요즘 흰 머리카락에 빠져 있다.
아이 등원 도우미 선생님과 종종 산책을 나가는데, 그때 자주 마주치는 할머니가 있다. 할머니는 백발이 햇살 아래에서 아주 밝게 빛났다. 아이 눈에 신기하고 좋아보였는지 그를 가리키며 "할머니 머리 머리" 했단다. 등원 도우미 선생님이 "할머니 머리 하얗지?" 했더니 아이도 "하얗다"라고 따라 말했단다.
아이는 집에서도 종종 그때가 떠오르는 듯 불현듯 "할머니 머리 하얗지" 하더니, 이제 내 머리카락을 만지며 "엄마 머리 까매" 하고 말한다.
요즘에도 산책 중에 그 할머니를 만난다고 한다. 때로 할머니가 모자를 쓰고 있으면 아이가 모자를 벗기려 든다고. 예의 없는 행동이라 그 사건을 전해 듣는 내 마음은 조마조마한데, 할머니는 아이를 귀엽게 여기며 모자를 벗어 아이에게 머리카락을 만져보게 해주신단다.
아이는 그전에 검은색에 집중한 때도 있었다. 아이가 길을 가다 어딘가를 가리키며 "머리카락 머리카락" 하길래 그쪽을 바라보니 털이 길고 까만 개가 있었다.
'검은 개 증후군(Black Dog Syndrome)'이라는 말이 있다. 영미권 보호소에서 털이 검은색인 개가 다른 개에 비해 입양이 잘 안 되는 사례에서 나온 말이다. 이 현상을 검은색을 꺼리는 문화적 배경에서 기인한다고 이해하거나, 검은색이 사진에서 상대적으로 돋보이기 어려운 점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실제로는 털 색깔과 관련이 없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어쨌든지 '검은 개 증후군'이 바로 떠오를 정도로 내 눈에 그 검은색 개는 그다지 귀엽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 눈엔 무척 특별해 보인 것 같았다. 자기 관심사에 대한 집중과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한 회피가 매우 뚜렷한 아이가 정말 환하게 웃으며 손으로 여러 번 가리켰으니.
검은색 털이 매력 없거나 불길한 징조가 아니고, 새치나 백발이 가리고 싶은 노화가 아니라 아주 특별히 멋있고 예쁜 특징으로 바라보는, 아이의 그런 시선이 참 좋다.
|김혜인. 중견 교사이자 초보 엄마. 느린 아이와 느긋하게 살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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