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필 '에세이'] H에게-짧아진 가을

시사위크
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올해 가을은 꽤 우울하고 쓸쓸했네. 사계절 중 가장 짧은 계절을 마음껏 즐길 수 없었기 때문이지. 지난 몇 년 동안 제천 청풍호 주변 언덕에서 호수를 내려다보면서 찍었던 사진들을 보면서 몸과 마음을 달랬어. 매년 예닐곱 번 가서 고향처럼 정이 든 곳이야. 그곳에 가면 몸과 마음이 동시에 편해지는 걸 느껴. 언덕에 서서 아름다운 주위 풍경을 카메라에 담으면서 혼자 중얼거리는 말이 생각나네. “여기에 다시 올 수 있을까?” 노인이 되면 하루 앞도 장담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에 혼자 자주 했던 질문이야. 올해는 늦은 봄부터 허리 병을 앓으면서 가을이 다 끝나갈 때까지 아직 가지 못하고 있네. 그러니 더 씁쓸할 수밖에.

어렸을 적부터 가을을 무척 좋아했네. 가장 큰 이유는 추수의 계절이라 먹을 게 많았기 때문이야. 아버님이 초가을에 만든 올벼쌀을 주머니에 가득 넣고 다니면서 동무들과 나누어 먹었던 기억이 나네. 그땐 사탕이나 과자가 드문 세상이어서 애들에게는 올벼쌀도 귀한 군것질거리였어. 동무들과 놀다가 목이 마르면 밭에 있는 생무를 뽑아 손톱으로 껍질을 벗겨 먹기도 했지. 배고프면 고구마를 깨서 먹기도 했고. 논에서 잡은 메뚜기를 집에 가져와 볶아 먹으면 얼마나 구수했는지 몰라. 하지만 어린 시절 가을에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물에서 사는 것들이었네. 추수가 끝난 논에서 삽으로 흙을 깊게 파면 꿈틀거리던 누런 미꾸라지로 끓인 추어탕. 도랑을 막고 물을 품어 잡은 붕어와 민물새우에 고추와 무를 넣고 만든 붕어찜. 저수지에서 족대로 잡은 메기와 가물치를 넣고 끓인 매운탕. 생각만 해도 입안에 침이 도는 가을 먹거리들이지.

하지만 이제 다 추억의 먹거리일 뿐일세. 올벼쌀은 지금도 쌀집에서 살 수 있지만 이빨이 나빠서 씹을 수 없고, 냇가와 저수지에 살았던 물고기와 민물새우는 다시 볼 수 없어. 논에서 살던 미꾸라지와 메뚜기도 사라진 지 오래되었네. 농약으로 인해 물이 다 오염되었기 때문이지.

가을을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는 가을에만 볼 수 있었던 파란 하늘 때문일세. 예전에는 보통 9월 중순부터 가을이었네. 내가 자랐던 고향은 넓은 평야 지대여서 하늘이 매우 넓었어. 그땐 두 눈으로 보고 즐길 수 있는 것들이 많지 않았지. 집에는 동화책도 없었고, 텔레비전도 없었어. 그래서 혼자 있으면 하늘만 쳐다보고 있을 때가 많았네. 10km 정도 떨어진 무등산 정상을 자주 올려다보았던 것도 다른 볼 것이 없었기 때문이야. 내가 강원도 인제 골짜기에서 군 복무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게 뭔지 아나? 하늘이 너무 좁았던 거야.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여서 얼마나 답답했는지… 생전 처음 보는 반쪽 하늘이어서 적응하느라 고생했어.

예전 가을에는 눈이 시리게 파란 하늘을 볼 수 있는 날이 많았네. 윤동주 시인이 <소년>에서 “가만히 하늘을 들여다보려면 눈썹에 파란 물감이 든다. 두 손으로 따뜻한 볼을 쓸어보면 손바닥에도 파란 물감이 묻어난다.”라고 읊었던 게 결코 과장이 아니야. 실제로 파란 하늘을 보고 꿈을 키우던 날이 많았어.

하지만 이젠 가을은 짧아졌고, 그 짧은 가을에도 파란 하늘을 보기 쉽지 않네.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후변화로 맑은 날이 줄어들었기 때문이야. 대신 하늘이 미세먼지로 희뿌옇거나 비가 내리는 날이 많아졌지. 올해 10월은 유난히 비가 자주 내렸네. 기상 관측망이 전국으로 확충된 1973년 이후 올해처럼 비가 자주, 많이 내린 10월은 없었다는 게 기상청의 발표야. 올해 10월에 비가 내린 날은 14.2일로 평년 10월 강수일 4.9일보다 2.4배 많았고, 전국 평균 강수량도 173.3mm로 평년 강수량 63.0mm보다 2.8배 많았어. 작년 10월에도 비가 내린 날이 11일로 올해 다음으로 많았다네. 이러니 가을에 파란 하늘 보기가 점점 더 힘들 수밖에.

며칠 전 동네 어린이 놀이터에서 ‘낙엽 싸움’을 하는 할머니들을 보았네. 사람은 나이가 들어도 어렸을 적 재미있었던 일들은 잊지 못하나 보네. 나도 낙엽, 특히 은행나무 낙엽이 수북하게 쌓여 있으면 장난기가 발동할 때가 많아. 겨울에 눈이 많이 내려 쌓이면 눈싸움을 하고 싶은 것처럼 말일세. 수북하게 쌓인 낙엽 뭉치를 서로에게 던지면서 놀고 있는 할머니들이 정말로 가을을 즐길 줄 아는 분들 같았네.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서 끼고 싶었네. 뭐든 할 수 있을 때 해야 하거든. 지금보다 더 늙으면 그런 장난도 할 수 없어.

할머니들 노는 걸 보니 갑자기 아직 잎을 떨구지 않은 은행나무가 보고 싶더군. 정희성 시인이 <가을날>에서 바람에 하늘대는 코스모스를 보고 읊었던 “마음이 철렁했다/ 나에게 남은 날이 많지 않다”라는 시구도 떠올랐거든. 그래서 인터넷 검색을 한 후 부랴부랴 강원도 원주시 문막읍 반계리에 있는 은행나무를 보러 달려갔네. 1,300살이 넘은 우리나라 최고령 은행나무라는데 수형이 얼마나 크고 아름다운지…. 그렇게 웅장한 은행나무는 생전 처음 보았네. 무성한 노랑 잎을 아직 그대로 달고 있는 은행나무가 뿜어내는 신성한 기운을 잔뜩 받고 돌아왔어. 온몸으로 직접 느낀 황홀감 덕분에 허리 통증도 잠시 잊을 수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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