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학 박사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로 끝났다. 김정은-트럼프 회동을 둘러싸고 이런저런 기대감이 부풀어 올랐지만 결국 불발된 것이다. 10월 말 경주 아태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방한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강도 높은 ‘러브콜’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끝내 답을 보내지 않으면서 두 사람의 만남은 이뤄지지 못했다.
사실 김정은-트럼프 회동이 만만치 않아 보이는 조짐은 적지 않았다. 북한이 미사일 도발을 감행한 건 물론이고, 최선희 북한 외무상이 러시아와 벨라루스를 잇달아 방문하는 일정에 나서면서 빨간불이 켜졌다. 북미 정상회담 형태의 만남에서 대미통이자 김정은 위원장의 외교책사인 최선희가 빠진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대치가 높아가면서 희망회로가 돌기 시작했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판문점에서 북한이 제초작업을 한 걸 두고 ‘이례적인 일’이라며 이를 트럼프 대통령 맞이를 위한 좋은 징조로 해석했다. 물론 곧바로 통일부 대변인이 별일 아니란 식으로 브리핑하면서 수습에 나섰지만, 이런 해프닝은 이재명 정부 내에서 북미 정상 회담에 대한 기대감이 한껏 고조됐음을 엿보게 했다.
김정은-트럼프 회동이 성사돼 북미 관계의 진전이 이뤄지면 남북관계의 돌파구도 열리지 않을까 하는 이재명 정부와 대북부처 고위 당국자들의 바람은 결실이 없었다. 분단의 상징인 판문점이든, 김정은 위원장이 야심차게 조성한 강원도 원산의 해양리조트이든 북미 정상의 회동은 엄청난 의미를 지니는 게 틀림없다.
지난 2018년 2월,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북한이 한미를 각각 상대하는 대화테이블에 나옴으로써 한반도에는 평화와 화해의 기류가 감돌았다. 하지만 이듬해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파국을 맞으면서 다시 얼어붙었다. 넉 달 뒤 이뤄진 김정은-트럼프의 판문점 회동에 문재인 당시 대통령도 자리하면서 남북미 정상 만남이 이뤄졌지만, 제대로 된 돌파구를 만들지 못했다. 김정은 위원장의 ‘하노이 굴욕’ 충격파가 컸고 그 트라우마는 상당기간 이어지고 있다.
특히 남북관계는 회복에 대한 전망이 어려울 정도로 경색됐다. 배경을 자세히 알 순 없지만, 문재인 전 대통령의 북미 하노이 회담에 대한 조언이 잘못돼 김정은 위원장이 이에 대한 불만을 표출한 것이란 해석과 함께 2018년 9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 정상회담에서 문재인 전 대통령이 평양 주민을 대상으로 한 대중 연설과 백두산 등정 같은 이벤트로 ‘한 몫’ 챙긴 뒤 북한에 아무런 대가를 지불 않고 ‘먹튀’를 했기 때문이란 관측이 나온다.
김정은 위원장으로서는 아직 때가 아니라고 여겼을 공산이 크다. 첫째는 트럼프 대통령의 북한 핵에 대한 인식을 북한 지도부가 신뢰하기 못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이 많은 핵무기를 가졌다며 ‘뉴클리어 파워(nuclear power)’를 여러 차례 칭하면서 북미 회동을 희망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선 ‘북한을 핵 국가로 불렀다’거나 ‘북한 핵을 용인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제기했지만 정작 트럼프 대통령과 미국 행정부의 공식 입장은 결이 달랐다.
트럼프 대통령은 방한에 앞서 일본 도쿄에서 열린 미일 정상회담에서 북한의 비핵화에 대해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와 의견일치를 봤다고 일본 측이 밝혔다. 이런 대목에 의구심을 가졌던 북한은 아마도 북미 정상회담 불발 이후 트럼프 행정부가 대북제재 연장 조치를 취한데 대해 ‘역시 미국은 믿을 게 못 된다’며 부들부들 떨었을 수 있다. 실제로 북한은 11월 6일 외무성 미국 담당 부상(副相, 차관) 김은철의 담화를 통해 “미국의 악의적 본성이 여과 없이 드러났다”고 비난했다.
둘째는 북미 정상회담을 위한 판이나 의제 등이 제대로 갖춰지지 못하고 있다는 상황 판단을 했을 수 있다. 하노이 회담 당시 김정은 위원장은 대북제재 해제를 미국으로부터 관철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고, 이를 위해 북한 핵 시설 동결 등에 대한 카드를 갖고 임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더 많은 핵 시설을 운용 중이라는 미국 정보 당국의 자료 등을 제시하면서 김정은 위원장을 압박했다. 이에 대한 대응 입장을 유연성 있게 제시하지 못한 김정은 위원장으로서는 참담한 결과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트럼프 대통령의 한국행이 가시화 된 지난 9월 20~21일 열린 최고인민회의 연설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만약 미국이 허황한 비핵화 집념을 털어버리고 현실을 인정한 데 기초하여 우리와의 진정한 평화공존을 바란다면 우리도 미국과 마주서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밝힌 것은 하노이 때와 판을 달리하겠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더 이상 대북제재 해제나 비핵화에 맞추는 협상을 않겠다는 것이다. 즉 ‘사실상의’ 핵보유국이란 인정을 미국으로부터 받아내겠다는 심산이다.
김정은 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의 제안을 거부하는 상황에서 주목할 대목은 그가 레드라인을 넘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에 대해 이런저런 입장을 밝히면서도 자신이 트럼프 대통령과 개인적인 인연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걸 잊지 않았다. 이는 자칫 강경한 대응이 회담 판을 아주 깨버리거나 트럼프 대통령의 분노를 살 수 있는 여지를 줄여보려는 의도로 보인다. 미사일 도발을 감행하면서도 자신이 직접 현장 참관을 하지 않는 등의 수위조절도 드러난다.
이제 관심은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이 언제 만나게 될 것인가 하는 문제다. 서로 아예 대면을 피할 수도 있지만 이해관계가 얽혀있어 어차피 회동할 수밖에 없을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중동과 우크라이나 전쟁 등을 마무리 짓고 북미관계와 북핵 문제까지 풀어내는 상황을 연출해 내년 11월 중간선거와 노벨상 수상을 위한 포인트를 쌓으려 할 수 있다. 무엇보다 김정은 위원장으로서는 트럼프 대통령 임기 내에 진도를 내지 못하면 이런 기회가 언제 또 올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려운 상태다.
이런 두 사람에게 다행스럽게도 내년 4월 트럼프 대통령의 중국 방문 일정이 잡혔다. 경주 APEC을 계기로 방한한 트럼프 대통령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한 뒤 “내년 4월 중국에 갈 예정이며 이후 시진핑 주석이 미국을 방문해 플로리다 팜비치나 워싱턴 D.C.에서 나를 만날 것”이라고 밝힌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이 미국을 방문하는 파격적인 일정이 아니라면 미국 대통령의 아시아 또는 인근 지역의 방문이 이뤄져야 북미 정상회담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방중은 놓치기 힘든 시점이 될 수 있다.
김정은 위원장은 12월 중순으로 예정된 노동당 전원회의 준비에 바쁜 상황이다. 올 한 해를 마무리하는 당 사업을 총화하고 자신이 직접 몇 시간 동안 보고를 하는 일정을 챙기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내년 초로 예정된 노동당 9차 대회는 5년마다 북한의 정책추진 방향을 밝히는 자리라는 점에서 김정은 위원장에게 무척 중요한 정치일정이다.
이제 김정은 위원장의 스케줄을 다시 내년 봄 트럼프 대통령과의 회동에 맞춰보기를 권한다. 경주 APEC에 맞춘 북미 정상 간 만남이 불발됐지만 천재일우의 기회가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다.
국제정세와 북한이 처한 현실을 깨닫고 미국과의 협상에 임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미국이 핵확산금지조약(NPT) 상의 비핵화 허들을 낮춰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할 것이란 기대를 하고 있다는 건 김정은 위원장의 오산이다. 일시적으로 트럼프 대통령과 합의를 한다 해도 3년 남짓 남은 임기 이후 미국과 국제사회는 복원을 꾀할 가능성이 높다.
새로운 전략과 전향적인 자세로 북한 체제의 생존과 주민의 삶과 인권, 그리고 남북관계와 한반도 안정을 위한 결단이 필요하다. 올 겨울이 김정은 위원장에게 내년 봄 트럼프 대통령과의 만남을 준비하는 전략과 공부의 시간이 되길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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