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사위크|남극=박설민·김두완 기자 ‘기후변화’하면 어떤 장면이 떠오를까. 뜨거워진 바닷물, 초대형 태풍과 홍수 같은 ‘열대기후성 재난’과 녹아내리는 극지의 빙하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모두 눈에 보이는 ‘가시적 피해’다. 하지만 이와 함께 우리 눈앞에 직접 드러나지 않는, 안개처럼 스며드는 또 다른 위협이 있다. 바로 ‘해양 산성화(Ocean Acidification)’다.
해양 산성화는 당장 피부로 느끼기 어려워 간과되기 쉽다. 바닷물을 마신다고 신맛이 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변화는 장기적으로 해양생태계와 인류의 삶을 근본부터 뒤흔들 수 있는 치명적 파괴력을 가진다. 그리고 이 조용한 죽음은 남극조차 위협하기 시작했다.
◇ ‘짠맛 대신 신맛’… 다가오는 해양 산성화의 위협
지구온난화를 발생시키는 온실가스 중 대표 물질은 ‘이산화탄소(CO₂)’다. 지구상의 이산화탄소 30%를 바다가 흡수한다. 이때 바다로 들어간 이산화탄소는 중탄산염, 탄산염과 같은 용존 무기탄소 형태로 변화된다. 이 과정에서 방출된 수소이온은 바닷물을 산성이 띄게 만든다.
이 같은 해양 산성화는 지구온난화로 인한 가장 치명적인 재난 중 하나다. 해양생태계의 먹이사슬을 붕괴시킬 수 있어서다. 최근 심각한 문제로 떠오르는 산호군 ‘백화현상’, ‘바다사막화’ 모두 해양 산성화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유엔환경계획(UNEP)에 따르면 해양 산성화는 매년 1조달러(약 1,400조원)의 경제적 피해를 유발할 수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더 큰 문제는 대륙에서 떨어진 남극조차 해양 산성화의 위협에 노출됐고, 시간이 지날수록 심각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 콜로라도대 볼더캠퍼스(University of Cololado Boulder, CU Boulder) 연구팀이 지난해 1월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남극의 로스해 지역 수질 평균 산성도가 1990년대 대비 2100년 최대 104%, 즉 두 배 이상 증가할 것으로 예측됐다.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현재의 중간 수준으로 배출하는 시나리오에서도 동기간 해양 산성도는 43% 높아질 전망이다.
남극 바다에서 산성화 위협을 가장 크게 받는 곳 중 하나는 ‘웨델해(Weddell Sea)’다. 남극반도와 코츠랜드 사이에 위치한 남극해 지역인 웨델해는 2,000km, 넓이는 280만km²에 이른다. 2002년 10만km²에 달하는 거대한 빙붕이 녹아 사라졌을 만큼 기후변화에 민감한 남극해 지역이기도 하다.
연구팀은 웨델해 지역의 대륙붕(육지에서 바다로 이어지는 수심이 얕고 경사가 완만한 해저 지형) 산성도는 1990년대 대비 2090년 144%까지 증가할 것으로 예상됐다. 수심이 200m 이상 깊은 하부 지역에서도 산성화가 130% 증가할 것으로 예상했다.

◇ 남극을 덮친 산성화, 고통받는 조개·물고기들
남극 해양의 산성화는 해양생물들, 특히 조개류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미국 앨라배마대 생물학과 연구팀은 남극의 이매패류 2종, 삿갓조개 1종, 완족류 1종을 4°C의 일정 수온에서 산성화된 해수에 노출시켰다. 그 결과 14~35일 만에 4종 모두 껍질이 녹아내렸다. 석회질의 조개껍데기가 남극의 산성화된 바닷물을 버티기 어려워진 것이다.
또한 어패류뿐만 아니라 어류종도 남극 산성화의 위협에 노출돼 있다. 지난해 김진형 극지연구소 생명과학연구본부 책임연구원팀이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남극 산성화는 주변 서식 어류종인 ‘남극대리석무늬암치(Notothenia rossii)’의 면역력을 떨어뜨리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는 주변 환경 변화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이다. 해양 산성화가 발생한 바다의 물고기는 평소와 다른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체내 향상성을 유지해야 한다. 이를 위해선 더 많은 에너지 소모가 필요하다. 이는 물고기들에게 피로를 유발하게 되고 면역 기능이 떨어지게 된다. 마치 우리가 피곤하면 감기에 잘 걸리는 것과 유사한 원리다.
연구진은 “기후변화로 인한 해양 산성화와 지구 온난화의 영향 확대는 해양 생태계에 중요한 스트레스 요인이 되고 있다”며 “이는 극지방 생물군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데 특히 산성화와 수온 상승이 결합된 환경은 남극 어류의 면역 체계에 더욱 해로운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우려했다.

◇ 기후변화에서도 생물은 길을 찾는다
다만 기후변화로 인한 위기를 생물 스스로 극복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그 시작은 남극이다. 남극세종과학기지에서 만난 서혜인 인하대 해양동물학연구실 연구원은 최근 ‘남극삿갓조개(Nacella concinna)’가 산성화된 바닷물에 적응하기 위한 진화를 거듭하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남극삿갓조개는 마리안 소만이 위치한 바톤반도, 남극반도 연안 얕은 물에 서식하는 조개류다. 탄산칼슘으로 이뤄진 조개껍데기 구조상 산성에 취약하다. 때문에 최근 발생하는 남극의 해양 산성화 현상에서 가장 큰 위험에 노출된 생물군 중 하나로 분류돼 왔다.

하지만 최근 서혜인 연구원팀은 이에 반박되는 연구 결과를 도출했다. 1995년부터 2018년까지 수집된 남극삿갓조개의 껍데기를 분석했다. 그 결과, 2000년대 이후 남극삿갓조개의 껍데기가 오히려 두꺼워진 것으로 나타났다. 해양 산성화에 대응하기 위해 유기물 함량이 많은 두꺼운 각피를 형성한 것이다.
서혜인 연구원은 “현재 남극에서 채집한 2개 샘플을 확인한 결과 한 개 샘플에서 껍데기 두께가 증가하는 것을 확인했다”며 “추가 실험이 필요하긴 하지만 이것이 남극의 산성화된 바닷물에 적응하기 위한 삿갓조개의 자체적 대응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냄비 속 개구리 이야기가 있다. 뜨거운 물에 들어간 개구리는 바로 튀어나와 살아남는다. 하지만 서서히 끓는 냄비 속 개구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죽는다. 해양 산성화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기후변화라는 조용한 죽음 앞에 새로운 생존의 길을 찾아야할 것으로 보인다. 남극의 삿갓조개들처럼 말이다.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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